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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무공 시호 9분 이준, 남이, 김시민, 김응하, 구인후, 정충신, 이수일, 이순신, 조영무 장군

by skView3rd2 2025. 2. 27.

목차

    조선시대 충무공 시호 9분 이준, 남이, 김시민, 김응하, 구인후, 정충신, 이수일, 이순신, 조영무 장군

    조선시대에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에게 주어지는 시호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특별히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 공로를 세운 이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시호는 단순한 명예를 넘어, 그들의 충성심과 희생을 기리며, 조선 왕조의 정신적 기둥을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충무공 시호를 받은 9명의 영웅들은 각기 다른 시대와 상황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고, 그들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줍니다.

    조선시대 충무공 시호를 받은 9명의 위인들

    조선시대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인물들은 각기 다른 전투와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헌신은 조선 왕조의 생존과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결단력과 용맹을 발휘한 인물들입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그중 9명의 충무공을 시대별로 살펴보고, 그분들의 업적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충무공 조영무 장군(1338~1414)

    충무공 조영무 장군

    조영무 장군은 조선 초기의 중요한 군사 지도자로, 조선 개국공신이자 태조 이성계의 신뢰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고려 말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군사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조영무는 외적의 침입을 막고, 국가의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왕조의 안전을 도모했습니다. 그의 공로는 단지 군사적 성과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안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충무공 남이 장군(1441~1468)

    남이 장군은 이준과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장군으로, 당시의 군사적 상황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한마디로 수양대군 일파의 앞잡이였으나 남이 장군의 삶은 짧고 비극적이었으며,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래에서 언급하는 이준 장군과는 달리 실질적인 무공이 남달랐던 장군으로 건주여진 토벌 등, 반란진압으로만 공신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닌 진정한 호국 장군으로서 건주여진 추장 이만주를 평안북도 만포시에서 주살해 버린 공도 있습니다. 불과 25세 나이에 정 2품인 자헌대부에 오르고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오르고, 26세에 무반의 끝판왕 병조판서에까지 오르는 등 무반 계열 넘사벽 능력자였습니다.

    충무공 이준 장군(1441~1479)

    충무공(忠武公)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 장군은 세조와 성종 시대의 장군으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군사적 능력과 리더십은 조선 초기 내란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이준은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라고 대충 평가할 수 있습니다만...

    세종대왕의 손자인 임영대군의 아들로 태어나서 귀성군으로 봉해졌으며, 어려서부터 호방하여 수양과 어울려 지냈으며, 종친은 출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무과에 응시해서 장원 급제해, 세조의 세력으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반란 진압의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 된 덕에 충무공 시호를 추서 받은 인물로, 역사물에서 딱히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세조시대의 충무공 시호는 거품이 낀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딱히 외란 보다는 내란이 더 심했던 시국에 왕 입장에서 혹은 왕권 측면에서 왕권을 수호한 인물에게 충무공 시호를 내린 것이니 딱히 크게 부당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세조에 대한 평가가 현대에 이르러 박한 수준임을 감안할 때 세조의 왕권 좀 지켰다고 무려 충무공 시호가 추서 된 점은 과하다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세조가 추서 한 것은 아니고 세조 후대에 추서 한 것이지만, 어차피 세조 이후의 왕들은 세조의 자손들이니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후에 등장하는 조선시대 충무공 (특히,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추서된 충무공)들은 구인후와 이수일장군을 제외하고 진정 나라를 위했던 구국의 영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1554~1592)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퇴한 영웅입니다. 그의 뛰어난 군사 전략과 강력한 리더십 덕분에 조선은 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진주대첩의 승리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로, 김시민 장군은 그 이후로도 조선의 독립과 자주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진주대첩을 이끌었지만, 진주성 사수와 함께 전사하셔서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2년에 사망하셨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

    이순신 장군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인으로 꼽힙니다. 임진왜란 동안 한산도 대첩, 명량 대첩 등에서 일본군을 연달아 물리치며, 조선을 지킨 영웅이었습니다. 그의 충성과 헌신은 오늘날까지도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며, 그의 업적은 단순한 전쟁의 승리를 넘어서 조선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습니다.

    광화문에 놓인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마치 신성로마제국 같이 조선 갑옷도 아니고, 덕수 이씨 스럽지 않은 외모...

    임진왜란에 이은 정유재란까지 다 막아내시고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셨습니다.

    사실 일본이 이순신 장군님에 대해 고평가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전적으로 이순신장군에게 패배한 일본으로서는 이순신 장군님의 실력을 신급으로 격상시켜야 자기들이 진 것에 대해 창피함이 덜하기 때문에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즉 별 능력도 없는 일개 장군에게 일본이 패배했다는 것보다는 자연재해급 능력이 출중한 전쟁의 신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진 것이 일본인들 습성상 자기 위로하기 딱 좋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들은 인터넷과 소설 영화로도 널려 있기에 따로 더 길게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모르면 그 자체로 간첩!^^

    충무공 김응하 장군(1580~1619)

    김응하 장군은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한 장군으로, 그의 희생과 용맹은 조선의 위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전사 이후, 그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충무공의 영예를 받았습니다.

    김응하 장군의 이름은 국가를 위한 헌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광해군 치세에 명이 후금을 칠 때 원군을 요청해 옴에 따라 강홍립 장군을 도원수로 후금 정벌에 나섰으며, 심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하고 유정이 전사하는 바람에 후급에게 역습을 당해 3천의 병사로 수만에 이르는 후금군과 전투를 벌여 조총 사격으로 1차 격퇴했으나, 2차 돌격에서 수많은 적을 물리치다가 전사하였습니다. 

    김응하 장군의 장렬한 죽음에 탄복한 명의 만력제가 조서를 내려 김응하 장군을 요동백에 봉하고, 처자에 백금을 하사였습니다. 조선 조정도 이에 맞춰서 김응하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충무 시호를 추서 했습니다.

    사르후 전투는 요새 제가 열심히 구독 중인 국립진주박물관 유튜브 채널에서 단편 영화 "사르후"로 공개했습니다.

    충무공 이수일 장군(1554~1632)

    이수일 장군 역시 이괄의 난을 평정한 중요한 장군으로, 그의 군사적 역량과 정치적 감각은 조선 후기의 안정과 질서를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충주 태생인 이수일(李守一)은 선조 16년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92년 장기현감으로 재직 중 임진왜란으로 장기현을 공격해 온 왜군에 쫓겨 달아났으나, 후퇴 중 왜군을 격퇴했다는 이유로 통정대부로 승진했습니다.(선조의 파격은 도덕책...) 이후에도 함창, 당교 등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계속 패전을 거듭했습니다. 1593년 밀양 도호부사로 경상좌도수군첨절제사가 돼서 울산에서 왜군을 격퇴한 공로를 인정받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합니다.... 임진왜란에서 이수일 장군의 업적은 거의 패전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 33년 북병사겸경성도호부사로 있던 중 여진족 마을을 공격해서 성채를 불태우고 야인 115명을 주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1601년에도 야인 토벌에 나서서 229명을 사살하고 포로 7구를 포획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심지어 아군 피해는 1명도 없는 성과를 올리는 등 드디어 전쟁에 각성하는 듯 보였습니다. 이후에는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선조 휘하에서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이수일 장군이 왜 충무공으로 추서 됐을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충무공 정충신 장군(1576~1636)

    정충신 장군은 천민 계급에서 출발하여 양반의 신분을 획득한 드문 사례로, 이괄의 난을 평정하며 국가를 지킨 장군입니다. 그의 노력과 충성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그의 이야기는 개인의 노력과 국가적 충성의 상징으로 후대에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충신 장군은 전라도 광주목 정윤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천출이라 천민이었습니다. 17세에 권율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노복으로 복무하며 민첩하고 영리해서 권율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권율이 장계를 올려야 할 때 의주까지 도망간 선조를 찾아가 장계를 전했는데, 이 경로가 왜군 점령지였기에 정충신만이 지원해서 성공했는데, 선조가 감복해서 이때 면천 시켜주었습니다. 면천된 정충신은 권율의 사위인 이항복의 제자가 되었고 무과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해서 무관이 됐습니다.

    여기까지는 정충신 장군의 빌드업이고, 1602년 조선 사신으로 명나라 파견을 가면서 여진족 동태와 정세를 파악했으며, 1617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정탐하고 돌아온 조선 후기의 첩보 왕이었습니다. 사르후 전투로 억류된 강홍립을 만나고 오고 팔기군의 규모와 깃발의 형태 등을 염탐해 보고하는 등, 외교와 첩보의 달인이었습니다. 병자호란 전까지 홍타이지 등을 외교와 첩보로 막은 인물이 바로 정충신 장군이었습니다.

    충무공 구인후 장군(1578~1658)

    반광해군파의 인물로 광해군에 반감을 품고 인조반정을 모의했으나, 반정 당시에는 느려서 서울에 도달하지 못해서 거사 현장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반정계획에 참여했기에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 되고 능천군(綾川君)에 봉해졌고, 1624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했습니다.

    정묘호란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런했을 때 후금의 군사를 막았으며 병자호란에는 군사 3천을 이끌고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위하였고, 1644년 심기원의 역모를 적발해서 고한 공으로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책록 되고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자 구인후 장군은 무슨 공으로 충무공 시호를 추서 받았을까요?

    결론

    조선시대 충무공 시호를 받은 9명의 위인들은 각각 다른 시대와 상황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인물들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충무공이 진정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은 아니지만, 그들 중 진정한 구국의 영웅의 충성과 희생정신은 단지 군사적 업적에 그치지 않고, 조선 왕조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 후대에까지 전해졌습니다. 비록 난을 진압하고, 왕권 확립을 위해 간신처럼 왕에게 붙었을지언정 그 시대의 시대상에서는 그러한 행동이 오히려 나라를 위하는 행위라고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안타까운 역사를 이끌어나가게 된 함량미달의 왕이 반정을 일으키는데 공을 세웠기에 충무공이 된 몇몇이 교활해 보이고 과연 충무공이라는 칭호로 불러줘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진정한 충무공들 만큼은 나라를 지켜주신 공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들 모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선의 안위와 번영을 위해 싸웠으며, 그들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국민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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